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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잔의 여유

사빈 코스모스 2007. 10. 28. 17:13
아침이 벌써 9시를 가리킨다. 어제 저녁 금요 철야 예배로 늦게까지 예배드리고 집에 와서 잠을 자면 금방 잠이 안 온다. TV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잠이 들면, 아침 일곱 시 까지 잠을 자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새벽 네 시에 평생을 일어나던 습관처럼 된 훈련이자만, 토요일은 자유다. 느긋이 침대에 누워 빈등 거리는 맛은 황홀하고 신비스럽다 . 일곱시면 일어나서 혼자서 하루를 생각하고. 어제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더듬어 정리하여 보기도 하고, 이것은 이렇게 하면 되는 건데 하기도 하고. 혼자 미소를 짓기도 한다. 뜬금없이 첫사랑이 생각이 나고, 초등학교 다닐 적에 내게 만년필을 준 대식이가 생각하면 보라색 무지개가 방안 가득히 내린다. 황홀하다. 시골구석이라고 무작정 서울 학교를 시험을 보러 올라 왔고, 첫사랑은 내 동생을 살살 꼬여서 내 일기를 장을 몰래 가져다 보고 마음을 정리하고 떠났던 그 첫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으로 서늘한 바람이 인다. 그렇게 한 삼십분 구릉을 오락가락 하면, 남편은 아내의 잠을 깨면 안 된다는 금기를 알아 옆방에서 자고 있다. 이런 아침은 흔히 나는 아침을 일찍 먹는다는 것은 야만인 것 같다.

이 좋은 아침은 그냥 즐기고 싶다. 하와이 헤이즈넛 커피를 끓여서 한잔 들고 마당에 나가 코스모스 꽃잎을 보고 백일홍 꽃잎을 만지고 햇살이 곱게 내리는 앞마당 잔디를 걸어 다니는 것이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토요일 아침이면 즐기는 단골산책길이다.

월요일서 금요일까지는 아침 네 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가야하고 그리고 남편 출근 시키어야 하고 그러노라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방송 드라마를 듣고, 그리고 오늘의 미국 강애신 뉴스를 듣는다. 하루를 시작하는 과정이다 . 이런 과정에서 토요일만은 이런 과정이 무시되어도 된다. 쫓기듯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밥을 안 먹고 산다면 세상은 더 아름다웠을 것 같다 . 적어도 먹는 것 때문에 싸우는 일은 없을 것 아닌가 싸움의 씨앗 하나가 줄어드는 것 아닌가, 먹기 위한 수고도 덜어 질것이고. 토요일만은 아침 일찍 먹는 식사에 자유 하는 것이 좋았다.

살기 위하여 아침 여섯시 반에 밥을 먹게 되지만, 음식 맛이 있어서 먹는 것 아니다. 오늘 하루 살기 위하여 배를 채우는 것 아닌가 . 그리하여 토요일 아침을 사랑한다. 그리하여 8시쯤 침대에서 나와서 밖을 나오면 잠을 안 깨운다고 옆방에서 막 잠이 든 남편의 옆모습을 보면 많이 늙었다. 허연 머리에 굵어진 허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는 습관처럼 4시면 일어나서 설치다가 옆방에서 7시면 잠을 잔다. 나도 그의 잠을 안 깨우려고 살금살금 문을 닫아주고 부엌에서 하와이 헤이즈 넛 커피를 끓여서 입안에 한 모금 넘기면 쌉쌀한 커피 맛이 참 좋다.

더 누워서 환상을 누리고 십지만 일어난 이유는 이 커피를 마시려고 일어난 것이다. 더 누워서 실낙원을 그리고 싶지만 커피 맛이 일어나라고 유혹을 한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직도 좋아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무덤에 계신 어머니의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꽃을 보면 보기에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남의 아픔을 보면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20년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잠에서 막 깨어서 피우는 담배 맛 때문에 방안에 뒹굴지 못하고 일어났다. 밥을 먹으면 급히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 태우는 담배 맛은 황홀하고 더 없이 행복 하였다.

커피를 한 모금 입안에 넣으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커피 맛 첫사랑 같다. 첫사랑은 감미롭고, 애틋하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싸하게 저려 오며, 혼자서 부끄러워지는 그 신비 같다.

오늘도 커피를 들고 황홀하게 아직도 꾸다 만 꿈을 더듬듯이 나의 일상을 더듬으면서 느긋이 즐기고 있었다. 그런 날은 시간 개념이 없다. 특히 오늘 같은 날 교회에 행사가 일찍이 없는 날, 얼마나 들뜨게 만드는가, 자유 아닌가. 행복을 만끽 하고 싶었다.

거실에 나가니 스파게리 깡통을 따서 불란서 빵을 찍어 먹고 있는 남편을 보니, 살아온 세월이 그의 어깨에 무게로 내려 앉아 있었다. 초라해 보인다. 이런 날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좀 늦게 아침을 먹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순전한 토종이라서, 보리밥에 된장을 먹어야 배가 편안하고 그 맛을 즐긴다. 언제 먹어도 보리밥에 된장이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데, 남편은 빵에다 스파게리, 소고기 스텍기를 먹어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질은 밥을 좋아 하는데, 그는 된밥을 좋아 한다. 나는 보리밥을 먹기를 원하면 그는 하얀 밥을 먹기를 원한다. 내가 젖은 음식 국이나 찌개를 먹기를 원하면 그는 마른 음식을 좋아한다. 그렇게 45년을 맞추고 살아오면서 얼마나 모난 것을 갈고 갈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가 깡통 스파게리쏘스에 빵에 찍어서 먹는 것을 물끄러미 보면서. 남편은 나와 사느라고 많이도 힘들었을 것이다. 나도 그의 성품 맞추느라고 힘들었다. 그가 우면 나는 좌이었다. 그는 동적이면 나는 정적이다 .

소녀적에는 나의 남편은 귀공자야 된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퇴근하여 돌아오고 저녁 식사 후에는 서재에 앉아서 책을 보며 서평을 하는 꿈같은 생활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는 아침에 출근 할 적에 양쪽 바지허리에 많은 열쇠 꾸러미를 달고, 쩔렁 쩔렁 소리를 내며 부릉 트럭을 몰고 나가는 노동자이다. 그와 맞추는 일은 돌을 보석으로 만들기 위하여 깎아 내는 것과 같았다.

그에게 여보 당신 나 같은 사람과 한평생 사느라고 힘들었겠소. 나는 지금 밥을 하여 된장찌개로 아침을 먹으려고 했는데, 그는 피식 웃으며 즐겁게 빵을 스파게리 소스에 찍어 먹으면서, 어느 하 세월에 당신한테 아침을 얻어먹겠소 한다.

오늘은 일찍 일을 나가는 것도 아닌데, 이런 날 느긋이 아침을 먹으면 안 되나, 그런 여유도 없나, 반문 하고 싶지만, 그는 내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리라 . 미안하오.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여, 했다.

40년이 넘도록 살아도 아직도 그의 마음을 다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 모른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서로 알아 가는 것이 부부 일 것이다. 남남이 함께 살아가는 길, 다른 인격체가 같이 동거 하며 맞추어 가는 길 , 다른 세계의 사람이 같은 세계 속에서 맞추어 살아가는 길, 나는 이일을 매일 매일 두근거리며 기대하며 살아간다. 오늘은 무슨 일이 내게 주어질까 하는 기대감 살아 갈만한 세상 , 아름다운 세상이다